하버드 출신 천재 수학자 테스 카진스키는 왜 테러리스트 유나바머가 되었나?
유나바머(Unabomber)는 미국 국내 테러리스트 테드 카잔스키(Ted Kaczynski)에게 붙여진 별명으로 “UNiversity and Airline BOMBER”의 줄임말이다. 이는 테러 대상이었던 대학(University), 항공(Airline), 폭파범(BOOMER)을 합쳐서 만들어진 것이다. 카진스키는 17년 동안 학계, 기업 간부 등에게 폭탄 테러를 저질렀으며, 이 테러로 3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당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 시작된 테러는 1996년 카진스키 동생의 제보로 미국 연방 수사국(FBI)에 의해 체포가 되면서 막을 내렸다. 현재는 가석방 없는 8번의 종신형을 선고받아 수감 중이다. 카진스키의 범행과 사상은 영화와 드라마로도 제작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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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카진스키는 I.Q. 167의 천재였다. 1942년 일리노이의 폴란드 혈통의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6세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하버드에 입학했다. 25세에 수학 박사 학위 취득하였으며 같은 해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최연소 교수가 되었다. 학계로부터 찬사를 받는 여러 수학 논문을 발표했으나 교수가 임용 2년 후인 1969년 이유를 밝히지 않고 교수직을 사임했다.
몬태나의 유나바머
카진스키는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교를 떠나 일리노이주 에버그린 파크로 돌아와 2년 동안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1971년 몬태나주 링컨 외곽의 숲에 지은 오두막으로 이사했다. 그는 생존기술을 배워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기를 원했다. 그 지역에서 허드렛일을 했고 그의 가족으로부터 약간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1975년이 되자 그는 집 주변 지역의 부동산 침식과 산업 개발로 인해 불안해했다. 프랑스 기독교 무정부주의 철학자 자크 엘륄(Jacques Ellul)의 글에 영향을 받은 카진스키는 개발을 방해하기 위해 링컨 지역의 건설 현장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 Kaczynski는 솔트레이크시티에서 거주하며 일을 하기도 했다.
유나바머 공격
카진스키는 1978년부터 1995년까지 17년에 걸쳐 16번의 폭탄 테러를 저질렀다. 그의 테러로 3명을 살해되었고, 23명이 부상을 입었다. 테러 대상은 주로 과학자, 기업가, 항공사 등 산업사회와 기술의 발전에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유나바머는 폭탄 제조법을 독학으로 습득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작고 위력이 강한 폭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노스웨스턴대학교 공학 교수 Buckley Crist로 소포가 의심스러워 캠퍼스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를 받고 소포를 개봉한 캠퍼스 경찰이 폭발로 인해 손 부상을 입었다. Kaczynski가 Crist를 표적으로 삼은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유나바머는 초기에는 미국 동부 시카고 일대에서 폭탄테러를 저질렀으나 5차 테러를 기점으로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982년 이후 3년간 폭탄 테러가 중단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 폭탄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실험을 하였다고 한다. 1985년 재개된 폭탄테러는 강도가 더욱 강력해졌다. 1985년 12월 새크라멘토의 컴퓨터 상점 주인인 휴 스크러튼은 유나바머가 보낸 폭탄으로 사망한 첫 희생자였다. 테러의 타깃이 된 사람들은 왜 자신들이 그런 일을 당했는지 짐작조차 못했다고 한다.
유나바먼의 첫 목격자가 나타난 것은 테러가 시작되고 9년이 지난 1987년이었다. 유타의 12차 테러 당시에 수상한 나무 상자를 두고 가는 남자를 가게의 직원과 손님이 목격하였다. 이때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그려진 몽타주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나바머의 몽타주이다. 콧수염이 있고 비행사 선글라스와 후드가 달린 스웨트 셔츠를 입은 남자였다.
1987년 이후 다시 6년간 휴식기를 가졌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반기술주의라는 자기 신념에 집중하였다고 한다. 두 번째 살인은 1994년 뉴저지 엑손모빌 광고사, 그의 마지막 테러이자 세 번째 살인은 1995년 4월 24일 새크라멘토의 목재 산업 로비스트 길버트 머레이를 살해한 것이었다.
Kaczynski는 마지막 폭탄 테러를 저지르고 1년이 지난 1996년 4월에 체포되었다.
테드 카진스키가 반기술주의 사상을 가지게 된 이유
반기술주의 사상을 갖게 된 이유가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나 그의 선언문이나 자서전을 보면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영향을 미쳤다고 추측할 수 있다.
- 어린 시절 병원에 격리되었을 때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기계적으로 대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 하버드 대학교에서 MK 울트라 계획의 일환으로 심리학자 헨리 머레이(Henry Alexander Murray)에게 고의적이고 잔인한 심리 실험을 당했다.
- 몬타나주의 산속에서 야생 생활을 하면서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중에 산업화와 개발로 인해 자신의 삶이 파괴되었다고 느꼈다.
- 자신의 철학적인 사상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철학자 자크 엘륄(Jacques Ellul),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 등의 저서를 읽고 영향을 받았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결합하여 카진스키가 기술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결국 카진스키는 기술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폭력적인 행동에 나섰다고 볼 수 있다.
유나바머 선언문
수많은 테러에도 불구하고 Kaczynski의 정체는 밝혀내지 못하고 있었다. 카진스키는 1995년 여름 "산업사회와 그 미래(Industrial Society and Its Future)"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언론에 게재할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더 많은 공격을 하겠다고 위협을 했다. 논란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법무장관 자넷 리노(Janet Reno)와 FBI 국장 루이스 프리(Louis Freeh)는 선언문을 발표하는데 동의를 했다. 1995년 9월 19일 8장 분량의 유나바머의 선언문이 워싱턴 포스트에 게재되었다.
선언문의 산업 혁명과 현대 기술의 폐해를 비난하고 원시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 카진스키의 테러는 옹호할 수 없지만 그의 선언문 내용을 옹호하고 수긍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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